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부름헬러 (문단 편집) == 다시 서부 전선으로 == 7월 20일, 다시 서부 전선으로 돌아오게 된 요제프 부름헬러는 이제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요제프 중사는 제2전투항공단([[JG 2]]) 제II비행단의 참모에 임명되었다. 7월 24일에 20대째 격추를 달성한 그는 8월에는 자신의 스핏파이어 격추 기록을 10대로 만들었다. 8월 30일부로 공군 명예컵을 받은 그는 9월 4일에는 31기 격추의 무공에 대하여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상했다. 이 서훈에는 부름헬러가 예전에 머물렀던 JG 53의 상관과 동료들의 추천에도 힘입은 바가 컸었다. 그렇지만 규정은 규정이라서 이 훈장은 JG 2로 공식 배속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승인되지 않았다. 같은 날, 제II비행단의 동료 조종사인 [[쿠르트 뷜리겐]](112대 격추)이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사이 부름헬러는 가벼운 부상을 입고 다시 베르노이헨 전투조종사 학교의 교관 임무를 맡게 되며 잠시 전선에서 떠나있을 수 있었다. 1942년 5월, 다시 최전선에 돌아온 그는 제1비행단에 배속되어 5월에 10대, 6월에 11대의 스핏파이어를 줄지어 격추키는 기염을 토했다. 이 전과에는 5월 31일에 촬영된 4대와 6월 5일에 건카메라에 찍힌 4대를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부름헬러는 임무 대부분을 루돌프 플란츠(Rudolf Pflanz : 1914~1942 / 52대 격추) 대위의 윙맨을 맡고 있었다. 루프트바페에서 윙맨은 철저히 편대장기를 엄호하고 보좌하는 역할에 국한되어 있던 사정을 감안하면, 부름헬러에게 격추 기회가 주어졌다면 더 많은 전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8월 19일에 [[디에프 상륙작전|디에프 전투]]에서 부름헬러는 그 유명한 전설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 날,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디에프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실패했다. 그 무렵 오른발에 석고를 댄 채 교관 생활을 하고 있던 부름헬러는 하루 동안 4회나 실전 출격을 감행하며 스핏파이어 6대와 블레니엄 1대(어쩌면 오인된 [[마틴 볼티모어|A-30]])를 격추시켜 대망의 1일 에이스(ace in a day) 호칭을 얻게 된다. 이 날 첫 출격에서는 엔진이 고장나 기지로 돌아오며 불시착하다가 가벼운 뇌진탕 사고를 겪은 그였지만, 재차 다른 기체로 갈아타고 두 번째 출격에 나서 스핏파이어 2대와 블레니엄 폭격기 1대를 떨구었다. 3회째 출격에서 스핏파이어 3대를 단숨에 해치운 그는 연이어 4회째 출격에서도 스핏파이어 1대를 격추시켰고, 이로써 1일 에이스와 함께 자신의 59번째 전과를 새롭게 고쳐쓰게 된다. 이튿날인 8월 20일에 가볍게 60번째 격추를 달성한 요제프 부름헬러는 다음날인 8월 21일에 [[독일 십자훈장|독일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10월 1일에 소위로 승진한 그는 150회의 전투 임무를 치루는 동안 67기 격추를 기록했고, 그 무공으로 11월 14일에 [[독일군]] 전체를 통틀어 146번째로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